결혼이주여성: 경찰·인권활동가·통역사… 유리천장 깨뜨린 ‘이주여성’들

한국에서 결혼을 한다는 건, 거의 사회적 책무에 가깝다.

과거엔 더 그랬다. '농촌 총각'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지속되자, 정부는 1990년대부터 국제결혼을 지원하는 각종 방안을 내놨다. 최근엔 농촌뿐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결혼 이주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지난해 11월 기준 22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3% 수준이다. 외국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5%를 넘어설 때 다문화사회로 규정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 따르면, 다문화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에 따르면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결혼 이주여성은 2007년 12만110명에서 2019년 28만7298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결혼 이주여성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여러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여전한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주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만의 길을 닦아나가고 있다. BBC가 한국의 '유리천장'을 깨뜨린 이주여성 3인방을 만나봤다.

  • 반복되는 결혼이주여성 향한 가정폭력 그리고 그 속사정
  • 코로나19가 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김 순경이 된 네팔댁

김하나 씨(31)가 지금의 한국인 남편을 만난 건 11년 전 네팔에서 주선받은 소개팅 자리에서였다.

당시 하나 씨는 고모의 제안으로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두 사람은 빠른 시간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했고, 이삼일 안에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그해 9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올 때까지만 해도 한글 한 자 몰랐던 하나 씨는 11년이 지난 지금, 화성서부경찰서 외사과에서 근무하는 경찰이다. 조선대 경찰행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8년 6월, 경기남부경찰청의 네팔어 외사 경찰공무원(순경) 채용시험에 합격해 그해 12월 정식 임용됐다.

"외국인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업무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저만 힘들어서(웃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경찰청은 경찰 임용자 중 귀화 한국인 통계를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 이 또한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김 순경의 사례가 얼마나 드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이 되기 전에는 그도 이러저러한 차별의 경험을 겪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 전남 담양에 살 때, 그는 아기를 등에 업고 버스를 탔다. 한 중년 남성은 호의를 베푼답시고 하나 씨를 향해 "베트남, 일루와"라고 했다.

"보통 같으면 '애기 엄마', '아니면 '아줌마'라고 했을 텐데, 그분들은 아무 생각 없이 불러도 차별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경찰이 된 이후 순찰을 돌고 현장에 출동할 땐, 특별한 차별의 경험은 떠올릴 수 없다고 했다.

"일단 제가 제복을 입고 있고, 옆에 총도 차고 있고, 순찰차도 타니까 외국인이라고 전혀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요. 또 112 신고할 정도면 정말 급한 상황이어서 경찰이 외국인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해 경찰이 되기까지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 순경이 합격한 외국인 특채의 경우, 대부분은 외국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그만큼 높은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귀화 한국인이 드물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도 큰 힘이 됐다. 남편은 아내의 임신을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어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김 순경을 조선대 어학당에 등록시켰다. 그는 결국 그곳 경찰행정학과에 지원해 재학 시절 경찰 시험에 합격했다.

대학을 다닐 때와 경찰 시험을 공부할 때는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줬다. 경찰이 된 이후엔 원래 살던 전남 담양에서 근무지인 경기 화성까지 온 가족이 이사를 했다.

물론 많은 이주여성들이 김 순경과 같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많은 경우 가사와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하루에 일정 시간 공부를 할 여유가 도저히 없다.

그래도 김 순경은 조언을 구하는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부분은 한국어 공부가 의사소통만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어 공부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한국어를 알아야 기회도 많이 열리고, 그래야 본인도 편하다'고 말은 자주 하는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김 순경은 한국도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외국인을 지원해주는 센터도 많아지고 있고,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는 행사도 많아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마트에서 코코넛을 못봤는데, 지금은 대형마트에 가도 코코넛도 쉽게 볼 수 있고요(웃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국회의원 문턱까지 갔던 베트남 '왕 언니'

서울 마포구의 이주민센터 동행 사무실 앞에서 만난 원옥금 대표
BBC

결혼이주여성 1세대인 원옥금 이주민센터 동행 대표(45)는 다문화가정과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증진을 위해 15년 넘게 활동해온 인권활동가다.

지난해 4·15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의 영입인사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국민공천심사단 투표에서 비례대표 후보에서 최종 탈락했다. 그는 "아직은 사람들이 저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돼 있었던 것 같다"는 짧은 아쉬움의 말을 남겼다.

원 대표는 이주여성 긴급전화센터 상담원,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이사, 서울시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인권다양성분과 위원, 서울시 외국인 명예시장, 주한 베트남교민회회장 등을 역임한 베테랑 활동가다.

그는 1996년 베트남 국영건설회사 재직 중 엔지니어로 파견근무 중이던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이듬해 한국에 입국해 1998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베 사전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한국어 공부를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어학당에서 선생님이 그럼 '한자'를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베트남에서 한자 사전을 공수해와서 한 자, 한 자 찾아가며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9년 동안 이렇게 독학을 했어요."

그는 한국 정착 초기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갈등을 겪던 다문화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원 대표가 '활동가'로 나선 건 2011년 인천의 한 사업장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던 베트남 노동자 10명이 경찰에 붙잡혀 가면서부터였다.

법정에 앉아있던 원 대표는 통역사가 '노조'라는 말도 제대로 통역하지 못할 만큼 통역이 엉터리인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손을 들어 자신이 대신 통역할 수 있겠느냐고 판사에게 요청했다. 그 자리에서 판사의 허락을 받은 원 대표는 이때 큰 자신감을 얻었다.

"이때 공권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거죠.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목소리를 내도 된다는 걸 알게 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 목소리를 최대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주여성에서 이주노동자 전체로 지원의 대상을 넓힌 것도 이때부터다. "이주여성들은 남편이라도 있지, 이주노동자들은 정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게 원 대표의 말이다.

그는 이주민들의 법적 권리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013년 건국대 행정대학원 법무학과도 졸업했다.

하지만 이런 원 대표도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주노동자들의 비자신청을 도와주기 위해 출입국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새로 개정된 규정을 알지 못했던 직원은 언성부터 높였다. 실랑이가 계속되자 직원은 반말을 하고, 원 대표가 당시 '서울시 명예시장' 명함을 내밀자 "어디서 이런 명함을 얻었냐"고 따져물었다.

원 대표는 "나도 이렇게 차별을 당하는데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어떻겠느냐"고 되물었다.

자녀 셋 홀로 키운 필리핀어 통역사

카일라(가명)가 한국에 온 건 24살 때이던 1999년이다. 그때는 한국어를 몰라 남편과 대화도 하기 어려웠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해외체류 경험도 없었고, 남편은 첫 남자친구나 다름 없었다.

두 사람은 통일교에서 맺어준 인연으로 필리핀에서 국제결혼을 했다. 하지만 몇년 뒤,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렀다.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다 결국 집을 나갔고, 세 아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모두 끊어버렸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필리핀에서 이혼은 금기여서 처음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1999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어를 전혀 몰랐던 카일라는 이제 법원과 경찰의 통역사로 일한다
Getty Images

하루 아침에 가장이 된 그는 인근 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월급은 한창 성장기의 세 아이를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도 상처를 받곤 했다. 그는 "큰 아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눈이 크다고 놀림을 받고 울면서 집에 오곤 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카일라는 법원과 경찰의 인도네시아어 통역사로 일한다. 한국 정착 초기 어려웠던 자신의 경험에 비춰 결혼 이주여성들의 멘토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제가 앞으로 받을 문화 충격에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한국 문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매운 음식 때문에 자주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주여성들에게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건 한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문화와도 결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주여성들의 한국 문화 동화만을 강조하던 다문화센터들이 최근 남편들의 역할도 교육에 포함시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봤다.

카일라도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한국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지길 바랄 뿐이다. 사실 아이들은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장남은 해군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IT기업에 다니고 있다. 막내딸은 케이팝 가수가 되기 위해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연습생 훈련을 받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치기 위해 제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한국 정부도 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더 기여할 수 있도록 이주여성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고,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