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이게 다일 리 없어

어쩌면 우리가 진정 어른이 되는 순간은 내 삶이 남들과 다르지 않음을 직시하는 뼈아픈 성찰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나도 남과 다르지 않게 주말을 기다리는 9-6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이 가는 게 아쉬워 차마 잠이 오지 않는 일요일 밤. 마침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만났던 싱가포르 친구가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을 했다.

" Angela, 잘 지내지? 문득 우리 다 같이 여행 갔던 추억이 떠올라서 사진을 보내!”

사진에는 동유럽 어느 작은 마을의 호스텔에 머물며 참 맛없어 보이는 볼로네제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는 스무 살 초반의 우리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연례행사로 교환학생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며 안부를 묻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그립기보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가능성으로 가득하던 순간들. 매일이 모험 같았던 설레는 나날.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그 두근거림. 그리고 시간에 함께 존재했던 서로를.

나는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말갛게 빛나는 사진 속 내 모습을 한 참 쳐다보았다. 지금의 동태 눈깔을 한 나와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내 인생이 이게 다라고? 분명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Quarter Life Crisis

이 단어가 요즘 내 눈에 자주 띈다. 직역하자면 ‘반오십의 위기’ 쯤이 될까?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진짜 사회에 발을 들인 사회초년생이 마주하는 우울감, 상실감, 두려움이 바로 Quarter Life Crisis다.

대학교 때 열심히 학점을 쌓고 대외활동을 해서 대기업에 들어가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최소 30년간 직장에 다녀야 할 텐데 지레 겁이 나고.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데, 또 막상 주말이 되면 별거 없고. 예전에는 〈파이트 클럽〉을 보며 브래드 피트의 미모에만 감탄했는데 이제는 에드워드 노튼의 삶에 공감이 된다면 당신도 아마 Quarter Life Crisis를 겪고 있는 중일 것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외국계 금융회사를 다니고 있고, 팀원들도 모두 좋은 사람인 데다 많지는 않지만 나를 정말 아껴주는 친구들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해야 할 것들 투성인데. (물론 내 방은 스트레스를 유발할 만큼 코딱지만 하고, 한 친구는 10년의 우정을 의심하게 하는 등 불행의 요소도 다분하다.) 어쨌든 나는 불안하고 공허하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대로 쭉 살아간다면 글쎄 몇 년 후 승진을 하고, 그럼 돈을 모아 아주 작은 집 한 채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30년 뒤에 은퇴해서… 잠깐, 은퇴하면 뭐하지? 근데 그전에 잘리면 어쩌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늘도 나는 잠을 설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왜 당신의 이십 대 후반이 당신 인생의 가장 최악의 시기인가(Why Your Late Twenties Is the Worst Tme of Your Life〉라는 에세이에서는 88,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에 스트레스 레벨이 가파르게 상승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로 스트레스 레벨의 상승폭은 줄어드나 이는 여전히 점진적으로 사십 대까지 상승하다가 은퇴 시기쯤 가파르게 하락한다.

스트레스는 20대 후반에 가파르게 상승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상승하다 은퇴 시기쯤 가파르게 떨어진다. @Harvard Business Review

" 아니, 그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스트레스보다 더한 게 찾아온다고? 앞으로 20년은 기다려야 나아진다고?

다행인 것은 스트레스 레벨은 사십 대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의 정도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30대 후반부터 긍정적인 감정을 더욱 많이 경험하게 되고, 전반적인 삶에 대한 만족도도 상승한다고 한다. 지독한 Quarter Life Crisis를 거치며 직장, 대외관계, 가족 등 외부환경을 컨트롤하는 능력을 점차 기르게 되고 덕분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지루하고 별 볼일 없는지에 대해 매일 밤 소주 나발을 불며 연민의 파티를 열기보다, 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인생의 순간들도 결국 지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리님, 인생에 대한 인수인계서는 없나요…?

그래. 우리의 삶이 버거운 이유는 우리가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요령 없는 신입사원이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것 같은 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 분명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Quarter Life Crisis는 불행을 가장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고통을 겪고 어쨌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 과에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킨다.

내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잠을 설쳐가며 고민하는 시간들은 ‘2.0 버전의 나’를 위한 업그레이드의 과정인 것이다. 왜, 사춘기와 중2병이 제때 오는 것도 축복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걱정의 시간들을 훌쩍 건너뛰어 버리면 문득 인생의 후반전에 후회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물론 끝이 보인다고 이 길이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일요일 밤마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연구로 증명된) 가장 깜깜한 시기인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을 지나치고 있는, 내 짧은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가장 잘 살았다고 소문날까 고민 하고 있는, 커리어, 연애, 우정, 가족 그 어느 하나 쉽지 않은 당신들과 Quarter Life Crisis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원문: 최지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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